웹진 「교육연구와 실천」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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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범대의 정체성?

(* “본 연구는 2019년 교육종합연구원 집담회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되었습니다.”)

 

정원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교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칭찬을 하거나 장점을 드러내 주면 좋아하고, 반대로 비난하거나 단점을 지적하면 싫어한다. 그런데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는 칭찬이나 비난과 무관하게 그런 것이 언급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 또, 그 이야기를 누가 하는가에 따라서도 반응이 많이 엇갈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성철 스님이 스스로 '나는 거짓말 하는 사람이여!'라고 말하는 것은 괜찮지만, 누군가 다른 사람이 ‘성철 스님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범대 정체성에 관한 글을 쓰기에 앞서 사범대학 졸업장이나 교사 자격증, 심지어 교육학 학위도 없는 필자가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 것인지, 또 비난이야 감수하면 된다고 해도 필자의 말이 온전히 전달될 것인지, 왜 자꾸 필자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지는 것인지 등에 대한 상념들이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현재 필자가 반드시 이러한 주제로 글을 써야 한다고 강요받고 있는 상황은 아니므로, 사실은 필자의 마음이 이러한 주제 주위를 늘 맴돌다가 주어진 기회를 활용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사범대에 몸담은 이래 사범대에서 필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는 인문학, 그중에서도 철학 전공자이며, 거기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범대학에서 승진을 하려면 교과교육과 관련된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요구를 받을 때, 학생들에게 철학이 아니라 철학교육을 위한 강의를 해야 할 때, 또는 외부인들이 사회과교육과 관련된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는 등의 상황에 접하게 되면,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의문이 고개를 쳐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물론 나는 이 모든 일들을 일종의 비즈니스로 생각하여 영혼 없이 수행할 수도 있고, 사회적 의무로 간주하여 내키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선택지 모두 불만족스럽기는 매한가지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영혼 없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 같고, 또 교육 관련 일들이 온전히 사회적 의무가 되면 사회적 평가는 나쁘지 않을 수 있어도 개인적으로는 자기 소외의 그물을 뒤집어쓰는 꼴이 되고 만다. 이 두 길이 아니라면 남은 길은, 그리고 최선의 길은 나의 학문적 영혼과 사범대학, 또는 사범대학 교수직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조화시키는 길뿐이리라. 하지만 여기에도 한 가지 장애물이 버티고 있다. 그것은 사범대학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 자체가, 조금 더 넓게 보면 사범대학의 정체성이 그렇게 명료하지 않다는 점이다.

  사설이 좀 길기는 했지만 이제 필자의 의도가 분명해졌으리라 본다. 필자가 이 글을 통해서 하려는 이야기의 주제는 사범대학의 정체성이지만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고민의 소산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하려는 이야기는 사범대학이 현재 이러저러하다거나, 또는 사범대학의 미래가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개인적 고민에서 출발하여 사범대학의 정체성을 이러저러하게 생각해 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그런 한에서 [동의나 동감이 아니라] 공감의 피드백이 주어지기를 바라고, 그 덕분에 필자 자신의 고민 또한 더 큰 범위에서 학문적, 인격적으로 통합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정체성에 관한 논의는 관점이나 입장에 따라 매우 복잡한 형태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서울대학교의 정체성은 내부 구성원의 관점에서는 국가 선도 대학이지만, 학부모들의 관점에서는 입학하기 가장 어려운 대학, 사회 계층적 관점에서는 고소득층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대학 등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사범대학의 정체성은 이처럼 일반적 수준에서는 중등교사 양성기관으로 오히려 명료하게 정의된다. 하지만 교육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특히 사범대학 내부에서 보면 내용이 좀 달라진다. 우선 사범대학은 의과대학이나 법학전문대학원처럼 국가 공인 자격자를 배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그런데 사범대학 졸업생들은 이러한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의과대학이나 법학전문대학원 졸업생처럼 별도로 자격 고사를 보지는 않는다. 또, 사범대학 대학원은 전문대학원이 아니라 일반대학원으로 분류된다. 즉, 사범대학과 달리 사범대학 대학원은 교사 양성기관이 아니며, 교육적 주제, 교과와 관련된 주제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곳인 것이다.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범대학의 교수진은 매우 다양한 전공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사범대학 관계자들은 사범대학의 문제를 다룰 때 전통적인 학문 분류 방식보다는 사범대학에서만 고유한 전공 분류, 즉 내용학, 교육학, 교과교육이라는 범주를 즐겨 사용한다.

  필자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사범대학 외부인들이라면 우선 왜 이런 구분이 발생하는지부터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또 이러한 구분이 인적, 제도적 구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만 보게 되면 이러한 구분의 본질적 의미가 간과될 수 있으므로, 이러한 구분의 의미를 내용적 측면에서 필자가 이해한 대로 서술해 보도록 하겠다.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필자의 전공이기도 한 「철학」 과목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도록 하자. 우선 사범대학 외부인들, 그리고 교육학 전공자 중에는 단순히 철학과 교육학을 별개로 배우는 것으로 「철학 교육」을 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반면에 교과교육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철학과 교육학을 별개로 배워서는 철학 교육의 전문성이 충분히 길러질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내용학을 하는 사람들은 철학 교육의 전문성 개발을 위해서는 교육학보다 내용학을 더 많이 공부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내용학, 교육학, 교과교육에 대한 이러한 일반화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많으며, 그런 한에서 필자의 이러한 주장은 과도한 단순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필자가 이러한 단순화를 통해 주장하려고 하는 것은 세 입장 중에 어느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아니라, 세 입장 모두 일리가 있으며, 그런 한에서 세 입장 모두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내용학 전공자의 주장은 우리 중등 교육 체계가 학문 중심 교육과정을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분명 타당한 면이 있다. 전술한 것처럼 철학 과목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철학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 가령 철학은 잘 알지만 교육학이나 교과교육은 잘 모르는 사람과, 반대로 다른 것은 잘 알지만 철학은 잘 모르는 사람 중에서 그래도 철학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전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내용학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취하고 있는 입장이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이런 사람에게 철학을 배우면, 설령 철학에 대한 지식은 증대할지 몰라도 철학을 싫어하거나 아예 공부 자체를 싫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교사가 <철학> 교육, 즉 학문으로서 철학에 중점을 두고 학생의 전체적 성장을 소홀히 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육학 전공자가 철학을 조금 공부해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그 학생들은 철학 내용은 잘 모르면서도 철학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고, 나아가 공부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학생들은 철학을 철학적으로 좋아하거나 공부를 철학적으로 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아이들은 철학이 무엇인지 맛을 보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교사가 설령 학생들의 전체적 성장을 도모한다고 해도, 그러한 성장이 구체적인 교육적 요소들의 구축을 통해 가능한 한에서 교육학만으로는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과교육 전공자들의 경우는 어떨까? 교과교육 전공자들의 경우는 가령 PCK(Pedagogical Content Knowledge) 같은 것을 중시하며, 이에 기반할 경우 내용학을 강조하는 입장에서와 달리 철학이나 공부 자체를 싫어하는 경우는 발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PCK는 일반적으로 특정한 내용을 전달하는데 필요한 지식이라는 점에서는 내용학의 경우와 유사한 한계를 지닐 수 있다. 앞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교과교육 논의들은 인간 전체의 성장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하다.

  그리고 이상의 서술을 통해서 필자가 교육적 맥락에서 내용학, 교육학, 교과교육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분명해졌으리라 생각한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 교육은 대체로 학문중심 교육과정에 근거하여 설계되었고, 따라서 그 중심에 사람, 즉 학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으로서 내용학이 있다. 교육학에서는 이러한 설계를 뒤집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경험중심교육, 역량중심교육 등으로 대표되는 인간중심교육의 이상은 그것의 구체적인 맥락을 사상함으로써 인간중심성을 다른 방식으로 비켜간다. 교과교육에서는 교수학습방법론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 인간론으로 확장되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논지이다.

  

  이제 목표점에 거의 도달한 듯하다. 필자의 전공은 공식적으로 사회철학 및 윤리학이며 최근에 주로 작업하는 내용은 정치철학, 민주시민교육 등에 걸쳐있다. 사범대학은 필자에게 교육적 맥락에서 무엇을 요구하고 있으며, 필자는 무엇을 하고 싶고, 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사범대학이 필자에게 내용학적 기여를 하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사범대학 학생들에게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령 홉스, 로크, 루소 등으로 대표되는 사회계약론에 대해서 강의를 해야 한다면, 철학 전공 학생들에게는 한 학기에 한 사람 정도만 다루면 될 것이다. 하지만 사회교육과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주마간산식으로라도 세 사람의 사상을 모두 다루어주는 것이 낫다. 물론 그것은 학문적으로는 한 사람의 사상을 상세히 함께 공부하는 것보다 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교과교육의 측면에서는 어떨까? 필자가 사회계약론자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으므로 그것을 교육하는 적절한 교수학습방법, 또는 PCK 등에 대한 연구나 강의가 가능할까? 이 글의 독자들 대부분은 필자에게 그것을 요구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필자 역시 그것은 필자가 전공 공부를 소홀히 할 정도로 집중하지 않는 이상 실행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반대로 사범대학 및 사범대학의 성원들은 필자에게 순수 교육학적 요구는 하지 않는다. 교육학은 필자의 전공이 아니며 필자가 교육학과에 몸담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은 당연할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외적 요구의 부재와 무관하게 필자의 전공이 사회철학 및 윤리학인 한에서, 필자는 인간론과 관련된 기여를 할 수 있다. 시민, 인간, 삶의 의미 등은 필자의 전공이 어느 정도 포괄하는 영역이다. 그러나 필자가 시민론을 다룬다는 이유로 심지어 사회과교육 내에서도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

  마지막으로 개인적 차원이든, 사범대학과 관련된 차원이든 내용학 전공자의 애환을 서술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전술한 것처럼 필자가 꼭 내용학을 가르치고, 연구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사범대학 내에서는 내용학 전공자로 분류될 것이다. 그리고 내용학 전공자들은 일반적으로 연구와 강의, 공부와 일이 분리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전공에 따라서는 대학원생을 확보하거나 지도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기도 한다. 연구분야가 다르다는 이유로 알게 모르게 행정적으로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들은 대처하기에 따라서는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가령 연구와 강의의 괴리는 사고 지평의 확장을 불러오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며, 대학원생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어렵다면, 거기에 필요한 에너지를 동료 연구자들에게 돌리면 된다. 그리고 행정적 불이익은 종종 불필요한 일을 절제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도 마지막 물음은 남는다. 나는 나의 공식적 소속과 별개로 사범대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없을까?